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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따스 음악중고등학교의 교장신부님과 후원회원님들이 글로 나누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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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9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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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노비따스음악학교 작성일19-09-09 10:46 조회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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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과 달리,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


  
복음: 마태오 5,17-37






성모자


부티노네(Butinone) 작, (1490),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보스톤의 한 보호소에 앤이란 소녀가 있었습니다. 앤의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술을 마시면 아내를 괴롭혔으며 이로 인해 엄마는 사망하고 맙니다. 아빠가 자녀를 키울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앤은 동생과 함께 보호소에 맡겨졌지만 동생도 죽자 두려움과 미움, 그리고 외로움의 충격을 견딜 수 없었던 앤은 정신분열증을 앓아 수시로 자살을 시도하고 괴성을 질러댔고 그 영향으로 시력까지 차차 잃게 됩니다. 결국 앤은 회복 불능 판정을 받고 정신병동 지하 독방에 수용되었습니다.

모두가 치료를 포기했을 때 한 은퇴한 노 간호사인 로라가 앤을 돌보겠다고 자청했습니다. 로라는 정신과 치료보다는 그냥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과자를 들고 가서 책을 읽어주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한결같이 사랑을 쏟았지만 앤은 담벼락처럼 아무 말이 없었고 괴성을 질러대며 음식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라는 앤 앞에 놓아준 초콜릿 접시에서 초콜릿이 하나 없어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로라는 계속 책을 읽어주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앤은 독방 창살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에 조금씩 반응을 보이며 가끔 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얘기했고 그 얘기의 빈도수도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앤은 로라 할머니에게 자신의 모든 아픔을 털어놓았습니다. 말하면 치유됩니다. 그리고 2년 만에 앤은 정상인 판정을 받아 파킨스 시각장애아 학교에 입학했고 밝은 웃음을 찾습니다.

그 후, 로라가 죽는 시련도 겪었지만 앤은 로라가 남겨준 희망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으로 시련을 이겨내고 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졸업했고 한 신문사의 도움으로 개안 수술에도 성공합니다.

수술 후 어느 날, 앤은 이런 신문기사를 보게 됩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를 돌볼 사람 구함!”

앤은 그 아이에게 자신이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고 결심합니다. 사람들은 못 가르친다고 했지만 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사랑을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으로 절망의 나락에서 자신도 치유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그 아이를 20세기 대 기적의 주인공으로 키워냈습니다. 그 아이가 헬렌 켈러이고, 그 선생님이 앤 설리번입니다. 앤은 헬렌과 48년 동안 함께 있어줍니다. 헬렌이 하버드 대학에 다닐 때는 헬렌과 모든 수업에 함께 하면서 그녀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가락으로 강의내용을 적어주었습니다. 헬렌은 말합니다.

항상 사랑과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준 앤 설리번 선생님이 없었으면 저도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제가 볼 수 있다면 가장 먼저 설리반 선생님을 보고 싶어요.”

앤 설리반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상한 마음은 충고를 주기보다 자신을 줄 때 아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실패하는 것을 계속하라. 실패할 때마다 무엇인가 성취할 것이다.”

 

설리반 선생의 말처럼 아무도 치유할 수 없고 자신까지도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상처는 자신을 내어줄 때에만 치유됩니다. 몸의 상처는 쉽게 발견되고 쉽게 아뭅니다. 누군가가 정신적인 아픔을 주었다면 육체의 상처보다 더 심각한 고통을 주고 더 치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육체의 상처, ‘정신적인 상처도 있지만 더 깊은 상처도 있습니다. 바로 마음의 상처입니다. 정신적인 상처는 자신이 왜 그런 아픔을 겪는지 스스로 알고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잇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자신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망가지고 싶지 않아도 망가지고 고치고 싶어도 고쳐지지 않습니다. 이 정도 깊은 상처가 있다면 자신의 힘으로 회복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정신적인 상처는 이러면 나만 손해야!’ 하며 스스로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마음의 상처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이 마음의 상처를 지니고 태어납니다. 우리도 우리 마음을 어찌 할 수 없어 이러지 않으려고 해도 이러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해도 죄를 짓게 됩니다. 하느님은 무엇이 죄인지 알려주시기 위해 율법을 주셨지만 허사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마음의 고질병을 이렇게 한탄합니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18-19. 24)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율법을 잘 지키는 자신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사람들이라 믿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자신을 모르는 것이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지 않는 교만의 죄입니다.

큐브라는 영화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몇 명의 사람들이 큐브 안에 갇히게 됩니다. 그들은 큐브 사이를 이동하며 탈출구를 찾다가 모두 죽게 됩니다. 그리고 자폐증을 가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한 사람만 살아남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처음부터 갇혀있었던 그 공간에 가만히 있었으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닌 것이 화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며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죄의 굴레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헬렌 켈러는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아이였습니다. 이 아이가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사랑이라는 단어를 배우게 되었을 때, 설리번 선생이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헬렌은 선생님이 오시던 날 나를 꼭 안아주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설리번 선생이 그녀에게 맞아 앞니가 부러지는 고통도 있었지만 그래도 꼭 안아주었던 그 심장에서 어떤 무언가가 나와서 그녀의 마음을 녹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육체가 다쳤다면 육체로 치유해주고, 정신이 다쳤다면 이성적인 위로로 치유해 줄 수 있지만 마음이 다쳤다면 누군가의 찢어진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사랑만으로 치유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찔린 심장으로 안아주어야 합니다. 어떤 누군가가 더 이상 언어로는 위로가 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면 그저 꼭 안아주십시오. 마음의 상처는 마음으로만 치유됩니다. 만약 나의 심장이 아직 찢어지지 않아 성령의 사랑이 흘러나오지 않는다면 내가 안고 있는 그 사람의 가시가 찌르게 내버려두십시오. 치유자가 되고 싶다면 그 치유하려고 하는 부위에 나도 상처가 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육체를 치유하기 위해 매를 맞으셨고, 정신을 치유하기 위해 가시관을 쓰셨으며, 마음까지 치유하기 위해 심장이 찔리셔야 했습니다. 상처 받은 사람이라야 치유해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설리반 선생은 상처 입는 것, 실패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죄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육체적으로만 해석하였습니다. 외적으로만 행동하지 않으면 율법을 지키는 것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겉으로만 살인하지 않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화가 올라오는 일이 없어야 하고, 간음을 해서가 아니라 아예 음탕한 마음이 생기지 않아야 하며, 스스로 무엇을 하겠다는 맹세까지 하지 않는 겸손함을 지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깊고 높은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죄의 법을 당신의 피인 성령으로 치유하지 않으면 인간은 절대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의 상처, 즉 뱀으로 상징되는 자아는 그 자체가 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말할 때에 .’ 할 것은 .’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아가 곧 악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향해서는 !’ 하고 죄에 대해서는 아니오!’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죄를 짓지 않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자아의 생각이기 때문에 악인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24-25)

예수님은 상처 받은 우리의 유일한 치유자이십니다. 그분의 늑방에서 흘러내린 피와 물, 즉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적셔 그 안의 못된 자아를 죽이십니다. 이것이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로마 8,1-2)

우리 자신이 곧 죄이고 죽음의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거든 우리 자신을 매일 제 십자가에 매달아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스스로는 벗어날 수 없는 라는 상처가 우리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아로부터 해방시켜 줄 분이 성령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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